개인의취향(6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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언젠가는
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그땐 내가 지금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슬퍼질 것이다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 때문에목이 멜 것이다 떄론 화를 내며 때론 화도 내지 못하며무엇인가를 하염없이 기다렸던 기억 때문에목이 멜 것이다 내가 정말 기다린 것들은너무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아그 존재마저 잊히는 날들이 많았음을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기다리던 것이 왔을 때는상한 마음을 곱씹느라몇 번이나 그냥 보내면서삶이 웅덩이 물처럼 말라버렸다는기억 때문에 언젠가는 ─언젠가는, 조은
2018.01.23 -
그렇게 못 할수도
건강한 다리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 할 수도 있었다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 흠 없이 잘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못 할 수도 있었다 개를 데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갔다 아침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렇게 못 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못 할 수도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,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못 하게 되리라는 걸 ─그렇게 못 할 수도, Jane Kenyon
2018.01.13 -
고적한 밤
하늘에는 달이 없고 땅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가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주는 죽음인가요 인생은 잠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작은 별에 걸쳤던 님 생각의 금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황금의 탈을 들고 한 손으로 천국의 꽃을 꺾던 환상의 여왕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금실과 환상의 여왕이 두 손을 마주잡고 눈물의 속에서 정사한 줄이야 누가 알아요 우주는 죽음인가요 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ㅡ고적한 밤, 한용운
2017.10.10 -
We need to talk about Kevin
케빈에 대하여 영상미, 배우들 연기력, 스토리, 음악까지 뭐 하나 안 빼놓고 더없이 완벽했던 영화. 심지어 제목까지 완벽한 것 같아. 영화를 보고나면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다. 이 영화로 에즈라 밀러라는 배우를 알게 됐는데 진짜 퇴폐미...b 난 약간 퇴폐미 있는 배우들에 확 끌리는 것 같다. 에즈라 밀러도 그렇고 데인 드한도 그렇고. 섹시라는 단어보다는 퇴폐미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배우들.
2017.09.20 -
자목련
너를 만나서 행복했고너를 만나서 고통스러웠다 마음이 떠나버린 육신을 끌어안고뒤척이던 밤이면머리맡에서 툭툭 꽃잎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백목련 지고 난 뒤자목련 피는 뜰에서다시 자목련 지는 날을생각하는 건 고통스러웠다 꽃과 나무가서서히 결별하는 시간을 지켜보며나무 옆에 서 있는 일은 힘겨웠다스스로 참혹해지는자신을 지켜보는 일은 너를 만나서 행복했고너를 만나서 오래 고통스러웠다 ㅡ자목련, 도종환
2017.09.15